사유와 자기 배려

창조적 교실 아닌 교실과 베테랑 아닌 배째랑 교사

예똘 2016. 1. 19. 20:50

에디톨로지   

 

한국의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실의 공간 편집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교실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교사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산만해도 된다.

어린아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집중하는 것이 더 이상한 거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강의실까지 죄다 앞의 선생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는 구조로는 경쟁 일변도의 교육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획일화된 교실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면 '창조 사회'는 꿈도 꿀 수 없다.(202) 

 

 

점점 경력이 엄청나게 많은 교사가 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내가 가르치는 방식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

내가 한창 수업에 열을 올리고 수업심사대회에 참가하여 상을 받곤 하던 시기의 수업 방법을

아직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에 지겨움을 느끼곤 한다.

무슨 '백종원 만능 간장'도 아니고 어떤 수업이든 나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란 말이다.

몸에 익었으니, 쉬우니, 능숙하니, 시간 낭비가 없으니...

이유(라고 쓰고 변명이라고 해석)는 많지만 스스로는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다.

초등학교, 특히 저학년은 아직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워야 하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던 차에 학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아주 역동적으로 살고 있음에 틀림없는 김정운 교수의 이 글을 읽고 나는 당장 실행에 옮겼다.

(이 사람 글은 묘하게 선동적이다.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인데도...)

 

아이들 23명에 담임인 나까지 모두 도우넛처럼 동그랗게 앉았다.

수업 시간 한 시간을 희생해서 교과서가 가득 든 무거운 책걸상을 낑낑 거리고 옮겼다.

1학년은 책상을 혼자 들지 못하니 거의 나혼자 옮겼다.

(도와주려는 기사도 정신 만발한 꼬마 신사들이 열정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셋 중 하나는 책상을 엎어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옳거니, 엎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화내지 않는다. 나는 계속 책상 줄을 맞춘다. 아이들은 모처럼 만난 신나는 여가 시간에 신나게 교실을 뛰어 다닌다. 난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아이들을 보내고 혼자 하면 책상이 이리저리 섞여 다음날 또 난장판이 되니 할 수 없다. 

 

하루는 좋았다.

난장판 분위기를 차분에게 만드느라 수업을 하지 않고 그림책을 읽어 주었고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참 좋았다.

그 다음날부터는 수학을 하고 국어를 한다.

난감하다. 설명을 해야한다.

나는 실물화상기를 켜고 아이들은 교실 앞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젼 화면을 본다. 창문 쪽의 아이들은 몸이 90도로 꺾인다. 화면쪽 아이들은 180도 돌린다. 그 사이 아이들은 90도와 180도 사이 어느 각도로 몸을 비튼다.

점심 시간이다. 떠드느라 밥을 안먹는다.

자신 이외의 모든 친구들 얼굴을 보며 밥을 먹으니 신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밥풀을 튀기며 소리를 버럭 지른 후에야 아이들은 식어빠진 밥을 먹는다.

새로운 수업 방법을 연구하며 열흘 정도를 버텨냈다.

아이들은 이제 도우넛 안에서 씨름도 하고 개인기도 하며 나름 적응해서 재미있게 논다.

할 말이 있으면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교실의 모든 친구에게 갈 방법도 생겼다.

그래서 교실 분위기는 참으로 화목하고 다정해졌다.

 

문제는 담임인 나다.

아이들이 다칠 것 같아서, 식판을 엎을 것 같아서, 500 데시벨은 될 것 같은 소음에 늙을 것 같아서 죽을 지경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교과서로 수업을 할 수가 없다.

 

이주 후에 나는 두손두발 다들고 다시 일제시대 배열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나는 아쉬운 '척'만 했다.

이젠 살 것 같다.

교실에서 신나게  놀며 공부하려면 교과서를 없애야 한다.

나는 이미 무엇으로 어떻게 가르치면 '국가와 민족이 원하는!' 아이들로 키울 수 있을지를 잘 안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나를 베테랑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대본을 보고 연기하는 연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