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확실히 달랐다.
첫날 아침 수업이 끝나기 전에 담임인 캐롤라인 피셔 선생님이 교실 앞으로 나를 끌어내어 막대기 자로 내 손바닥을 때린 뒤 정오 때까지 교실 모퉁이에 세워놓았으니 말이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투박스런 면셔츠에 밀가루 자루로 만든 스커트를 입고 있는 1학년 학생들에게 상상력의 문학이 생전 처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 듯했다.
이 학생들 대부분이 걸음마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목화를 따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면서 살아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선생님은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캐롤라인 선생님은 아빠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 나를 가르치지 말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아빠가 계속 가르쳐주시면 오히려 내 독서 실력에 해가 될것이라나.
"꼭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그만두고 싶어. 오빠, 그 빌어먹을 선생님이 아빠가 나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면서 아빠더러 그만 가르쳐주라고 하래---"
"스카웃 걱정 마.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캐롤라인 선생님이 지금 새로운 교수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거야.
대학에서 그걸 배우셨다나봐. 앞으로 곧 모든 학년에서 적용하게 될 거래. 그런 식이라면 책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게 될 거야 --- 말하자면 젖소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직접 가서 젖을 짜라는 식이야. 알겠어?"
"난 지금 너에게 1학년생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수법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거야. 그게 바로 듀이 십진법이라는 건데."
듀이 십진법이란 부분적으로는 '그'라든가 '고양이'라든가 '쥐'라든가 '사람'이라든가 '너'라든가 하는 낱말이 적힌 카드를 우리에게 흔들어대는 교수법이었다.
우리에게 어떤 언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이 인상적인 새로운 지식을 말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난 지겨워져서 딜에게 편지를 쓰다가 그만 캐롤라인 선생님에게 들켰고, 선생님은 아빠에게 나를 가르치지 말라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앵무새 죽이기, 39)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르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신들을 개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그 선생님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도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지금 쏟아지는 '인상적인 새로운 지식'이 내키지 않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어떤 '인상적인 새로운 지식'을 말없이 받아들이고만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적응될 만하면 몇 년 후에는 또다른 '새로운 지식'을 적용한다.
교육 사조가 바뀌었다나 뭐라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이거라나 뭐라나...
선생님도 어찌할 수가 없다.
나라의 세금을 축내며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입장이라
나홀로 교실에서 투덜이 스머프로 살아갈 수밖에...
아이들은, 선생에게 치이고, 부모에게 치이고, 새로운 지식에 치이고
선생은, 아이들에게 치이고, 학부모에게 치이고, 새로운 지식에 치인다.
암울할 것만 같은 교육을 받고도 잘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이 교육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인지...?
아이들이 스스로 멸균하며 생명력이 질기고 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는 것인지...?
전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에 동의하는 순간 학교교육은 힘을 덜 써도 되는 어찌보면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사유와 자기 배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가 필요한 날 (4) | 2024.11.01 |
---|---|
창조적 교실 아닌 교실과 베테랑 아닌 배째랑 교사 (0) | 2016.01.19 |
또 다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0) | 2012.05.16 |
전교사의 준-화가화! (0) | 2012.04.03 |
그냥 공부하고 살고싶은... (0) | 2011.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