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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라면을 끓이며(김훈)

2015년 초반..

  이 책을 발간하며 출판사 쪽에서 내건 사은품이 조기품절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있는데 사은품이 없어 책을 못파는, 그래서 독자를 우롱했다며 서점과 출판사 쪽에 고객이 항의를 하는, 이 웃픈 상황... 사은품은 무려 양.은.냄.비. 이렇게 많이 팔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의 책을, 아무리 산문집이라지만 양은냄비를 부록으로 내걸다니. 출판사는 음... 문학동네이다.

  이 저렴한 판촉 행위에 어이없어 하면서 김훈 작가의 심경을 헤아려 보았다. 칼에 베일 듯 날카로운글, 그의 성정도 어느 정도는 글과 비슷한 듯하다. 시대를 잘못타고 나서 주변과 불화하다가(사실은, 부인, 딸, 모든 친인척과도 불화하고 오로지 친구와 술과 화합한) 죽은 부친의 장례에서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고 동생을 꾸짖어 질리게 만든 가부장-마초기질이 가히 대한민국 톱클래스인 그가, 책을 팔아먹자고 양은냄비를 끼워 팔다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다니! 그가 허락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허락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제목은 [라면을 끓이며]지만 사실 라면 이야기는 초반 한 꼭지 뿐이다. 그 글마저 라면을 먹으며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김훈답게 가볍지 않은 글이다. 라면의 역사, 라면을 대하는 감성 - 라면에 대한 더 이상의 연구보고서는 없을 듯하다. 다른 글들도 소설로는 녹이지 못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기성세대의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측은하고도 안타까운 그러나 희망적인 젊은이들, 그리고 개인적인 기호를 담은 여러 산문들이 때로는 에세이처럼, 때로는 신문의 기획 기사처럼, 때로는 친구끼리 나누는 사담처럼 담담하고도 따뜻하게 그러나 예리한 필체로 씌여있다. 글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가 가부장-마초 기질이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점이 그에게는 매력이라는 것까지도. 사실 나는 이런 남(男)을 좋아한다. 수구스러운 보수는 질색이지만 (보수 대척점이 진보라면)진보를 가장한 이기적인 남(진가남) 또한 사절이다. 진가남들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쏘-쿠울~~한 듯 보이지만 자신의 여자나 가족에게는 진가남이 되어 상대에게 희생과 이해를 교묘하게 강요한다. 난 순진남(순수 진보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상형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순수한 가부장-마초가 좋을 수밖에. 돈에 대한 관찰을 읽으면 대놓고 보수적인 시각이 오히려 사랑스럽다. (다음 글에 나오는 아들은, 평발이니 병역면제를 신청하겠다고 아버지께 우겼다가 중앙지 신문 칼럼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지.. 아마... 이젠 베스트셀러 산문집에까지 등장.)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리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 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 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至嚴)한 것이다. 아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벌 수 있다. 우리는 구석기의 사내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 먹거리를 포획할 수가 없다. 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밥은 끼니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꼐 먹는 것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 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뮬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다 큰 사내들은 이걸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낱알들이 입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싯바늘을 발라내고 먹이만을 삼킬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근면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나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라면을 끓이며, 돈1, 178-181)

 

돈 버는 남자, 이런 아버지. 섹시하다.

밥을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 '아낙'인 나는 그의 글에서 소외된 인종이라는 점이 유감스럽기는 하나, 봐주겠다. 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전의 교육활동과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점심시간을 포함한 교육관련 업무라는 낚싯바늘에 꿰여 끌려다니는 나에 대한 변명을 그가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동시에 서글프다. 한동안은 끌려다님이 계속되겠구나-싶어서.

 

라면 끓듯 바글거리는 분주한 학년말.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가의 산문집을 몇 권 읽었다. 성석제의 글(칼과 황홀)은 깔깔대며 읽다가 금방 지친다. 개콘을 10시간 계속 보는 느낌이다. 조정래의 글(황홀한 글감옥)은 그의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장편 소설들을 떠올리게 했다. 태백산맥의 장중함을 기대하고 읽었던 소설들이 주는 당혹감. 장중함 대신 필부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산문들도 나쁘진 않다만. 박완서의 산문집(작고 예쁜 것). 나도 이런 소소하고 건강하고 예쁜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싶은 소소한 글들. 아~! 그러니까 산문집은 평범하고 소소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글? 김훈을 예외로 한다면!